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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통상수교 거부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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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은 서구 열강의 압박 속에서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방어적 조치였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의 근대화와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 이 글에서는 통상수교 거부 정책의 배경, 주요 사건,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겠다.

 

배경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했다. 조선은 이러한 서구 열강의 압박에 직면하게 되었고, 특히 러시아, 프랑스, 미국 등의 국가들이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며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

https://youtu.be/g_y0Ne_wdIE?si=YONcPprZRySsMCz5

 

주요 사건

병인박해와 제너럴셔먼호 사건

1866년, 조선에서는 천주교 박해 사건인 병인박해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수천 명의 천주교 신자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형되었다. 같은 해,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통상을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부하고 제너럴셔먼호를 침몰시켰다.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는 조선을 침략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점령했으나, 조선군의 저항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조선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신미양요

1871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조선을 침략했다. 미국군은 강화도를 공격했으나, 조선군의 결사 항전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조선은 전국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을 거부하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결과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일시적으로 지키는 데 성공했으나, 국제적 고립을 초래했다. 조선은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근대화가 늦어졌고, 결국 20세기 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19세기의 통상수교 거부 정책은 조선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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