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1820~1898)은 조선 후기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강력한 개혁을 단행한 인물이다. 그의 대표적인 정책 중 하나가 바로 쇄국 정책으로, 외세의 침략을 막고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조치였다.
쇄국 정책의 배경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들은 아시아 각국과의 교류를 확대하며 개항을 요구했다. 일본은 1854년 미·일 화친 조약을 체결하며 개항했고, 청나라도 서구와의 통상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러한 흐름을 거부하고 문호를 닫는 쇄국 정책을 유지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침략 가능성을 우려하며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펼쳤다. 특히 1866년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공격한 병인양요, 1871년 미국 함대가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 등의 사건을 겪으며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한국경제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대원군의 쇄국정책,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76) 대원군의 개혁, 쇄국정책과 조선의 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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쇄국 정책의 주요 내용
- 척화비 건립: "양이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즉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일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서양과의 교류를 거부했다.
- 외국 선박 접근 금지: 조선 연해를 순찰하며 외국 선박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했다.
- 천주교 박해: 서양 문물과 함께 들어온 천주교를 탄압하며 조선의 전통적인 유교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
쇄국 정책의 영향과 평가
쇄국 정책은 단기적으로 조선을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세계 정세에 뒤처지게 만들었고, 근대화의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본과 청나라가 개항 후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며 발전한 것과 달리, 조선은 쇄국 정책을 고수하다가 결국 1876년 강화도 조약을 통해 개항할 수밖에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쇄국 정책은 조선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국제 사회에서 고립을 초래했다. 이는 이후 조선이 외세의 압력에 쉽게 굴복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쇄국 정책은 오늘날에도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조선이 개항을 선택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여러분은 흥선대원군의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